260528 창 49:1-15 심은 대로 거두는 미래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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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두는 미래의 인생(창세기 49장 1-15절)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부모가 임종 직전에 자녀의 손을 붙잡고 하는 말, 스승이 제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 믿음의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남기는 신앙고백. 그 속에는 인생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야곱은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유언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단순한 축복이 아닙니다. 어떤 아들에게는 칭찬이 나오고, 어떤 아들에게는 책망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의 현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방향성과 미래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지켜보시고 잘 아십니다. 3절에, 야곱은 먼저 장자 르우벤을 부릅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르우벤은 원래 가장 큰 축복을 받을 만한 위치였습니다. 장자는 특별했습니다. 두 배의 유산, 가문의 대표, 영적 계승권. 이 모든 것이 장자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장자인 르우벤에게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4절에,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왜입니까?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순간의 욕망 때문에 인생 전체의 축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죄를 숨질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르우벤은 오래전에 그 죄를 지었습니다. 야곱이 그의 잘못을 알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은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면서 기억하십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봉사도 합니다.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건물과 같습니다. 아무도 우리 자신이 짓고 있는 인생의 건물에 대하여 모릅니다. 어떠한 마음과 노력으로 짓는 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그 순간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건물을 지었는가에 대해서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의 결과를 받게 됩니다. 숨겨진 삶의 태도와 마음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죄는 반드시 흔적을 남깁니다. 5-6절에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세겜 땅에서 있어났던 사건 때문입니다. 그들의 누이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수치를 당하자,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했습니다. 그들의 분노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분노가 잔인함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겜 남자들을 속이고 죽였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다루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15장 18절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분노 자체보다 통제되지 않는 분노를 경고합니다. 분노는 불과 같습니다. 잘 사용하면 따뜻함이 되지만, 통제되지 않으면 집 전체를 태워버립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분노 때문에 무너집니다. 한마디 때문에 관계가 끊어집니다. 감정 폭발 때문에 상처가 생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후회합니다. 한순간의 감정이 평생의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화를 낼 때마다 사과할 수는 있지만, 그 분노의 말에 대한 상처의 흔적은 깊게 남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함으로 인해, 야곱으로부터 축복이 아닌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도 사용하십니다. 이제 넷째 아들 유다 차례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유언이 유다에게 와서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야곱은 유다를 향해 놀라운 축복을 선언합니다. 8-12절까지, 그 누구보다도 길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놀랍지 않습니까? 유다가 누구입니까? 그는 앞장서서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며느리 다말 사건으로 부끄러움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창세기 37-38장은 그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유다를 하나님께서 택하십니다. 왜입니까? 그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창세기 44장 후반부를 살펴보면, 유다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놓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동생을 팔아버렸지만, 이제는 동생 대신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눈물만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바로 유다 지파에서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10절에,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비로 이 말씀은 메시아 예언입니다. 훗날 다윗 왕이 유다 지파에서 나오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지파로 오십니다. 하나님은 실패 없는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을 사용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상처 때문에, 결점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십니다. 불완전함을 온전함으로 바꾸시고,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우리의 모습에 상관없이 그의 언약을 지키시고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경을 뛰어넘는 믿음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13절에, 스불론은 야곱의 열 번째 아들이자,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입니다. 스불론의 지파는 이스라엘 땅에서 지리적 위치와 엄청난 복을 누리었습니다. 레아의 소망이 하나님께 응답 된 것입니다. 13절에,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라는 야곱의 축복은 스불론 지파의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스불론 지파는 해상 무역으로 인한 풍부한 재물을 누리면서 사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국가적인 위기 때마다 헌신했던 역동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사기 5장에서 드보라의 부름에 응하여 가나안왕 야빈과의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싸웠으며, 역대상 12장에서, 다윗의 군대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땅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14-16절에, 가장 낮은 곳, 이방의 빛이라고 불리었던 그들의 거처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진정한 거처가 된 것입니다. 잇사갈은 야곱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레아가 낳은 다섯 번째 아들입니다. 잇사갈은 스불론과 같이 성경에서 화려하게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후손들은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공동체의 튼튼한 허리 역할을 했습니다. 14-15절에, 잇사갈에 대한 축복도 독특합니다.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나귀는 묵묵하게 짐을 나르는 동물입니다. 잇사갈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동물입니다. 잇사갈 지파는 비옥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이 비옥한 평야 지대를 통하여, 잇사갈 지파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며 야곱의 예언대로 아름다운 토지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옥한 땅인 만큼 외세의 침략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국가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풍요를 누리며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나귀처럼 자신의 짐을, 자신의 책임을 묵묵히 감당하였고, 역대상 12장 32절에,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단순한 노동 지파를 넘어, 지금 이 나라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지를 정확히 판단하여 조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 지파는 풍부함과 펀안함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부함과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가장 충성스럽게 공동체를 섬겼습니다. 부유함과 편안함이 늘 축복은 아닙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유혹은 고난보다 부유함과 편안함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적당한 신앙이나 적당한 헌신, 적당한 예배를 드리며 영적으로 잠드는 것입니다. 신앙은 멈추는 순간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원하십니다. 교회는 쉼터이면서 동시에 훈련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순간의 욕망을 따라 살겠는가? 너의 감정대로 분노에 사로잡혀 살겠는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겠는가? 아니면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는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신앙인으로 살겠는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심고 가꾸는 과정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고 그 결과를 하나님 앞에서 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와 뜻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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