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20 창 44:14-34 완전한 중보자를 통한 완전한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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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중보자를 통한 완전한 회복 (창세기 44장 14-34절)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방법은 삶의 회복이고. 이 회복은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회복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인 관계의 회복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2장부터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심한 기근에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온 그의 형제들을 계속하여 시험합니다. 요셉의 시험은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과거의 죄에 대해 기억하게 하고,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결국은 관계 회복의 장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시험과 요구를 당하면서 이것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죄에는 분명히 대가가 따릅니다. 또한 이러한 죄의 형벌은 죄의 값을 치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의 잘못을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 함으로 결국은 회복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우리가 겪는 시험도 결국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장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당할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1. 완전한 회복을 위한 관계의 회복의 시작은 죄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6절에,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재판장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손 쓸 수 없이 그의 죄가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과연 어떻게 우리의 죄에 대해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죄악들을 숨김없이 고백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를 내어 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17절에, 유다의 말에 대해 요셉은 그들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고 베냐민만 노예를 삼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미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은 아버지 야곱이 동생 베냐민도 잡혀서 집에 올 수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 일어날 일에 대해 그의 형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생명을 걸고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서 나섰습니다. 18절에, 유다가 요셉에게, “내 주여 원하건대”라고 말합니다. “내 주여”의 표현은 다른 사람에게 간청하거나 자비를 구할 때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에는 ‘내 주여’라는 말 앞에 ‘제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면서 요셉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모든 문제들로부터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제발, 주여”라고 주님을 간절하게 부르고, 찾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간절함이 문제를 회복하는 시작이 됩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겸손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은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2.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들임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20절에,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라는 말은 죽은 라헬에게 홀로 남겨진 유일한 자식이 베냐민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보게 하라 하시기로”의 말은 사실 매우 과장된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42장 20절에서 요셉이 했던 말은 단지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다는 요셉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했던 말의 부당함을 과장하여 강조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떠나지 못할지니”의 구절에서 ‘떠난다’는 말은 회복되지 못한 채로 ‘버림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아버지에게 분리되는 것만이 아니라 분리되는 결과로 아버지와 베냐민이 비참하게 버려져서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유다는 동생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부단히 과장하여 말하면서 노력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23절에, 유다는 그의 아버지가 “너희 막내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을 언급하면서, 요셉의 요구로 인해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를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7절에, 유다는 요셉에게 베냐민을 다시 그의 아버지 곁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가정이 파탄이 날 수 있다는 말에 이어서 그의 아버지 야곱의 말을 계속해서 인용하며 요셉을 계속하여 압박하고 설득합니다. “알거니와”의 말은 아버지에게 라헬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는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는 말은 요셉이 동물에 의해서 찢기어 먹힌 것으로 아버지 야곱이 믿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찢겨 죽었다고 야곱이 말했다는 말 다음에 ‘만일’이라는 가정이 나옵니다. 성경의 모든 가정들은 다음에 나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재해가 베냐민의 몸에 미치면 야곱의 흰머리를 슬퍼하며, 즉 야곱의‘죽음’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 유다는 야곱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30절에,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라는 말을 하고 있는 유다 자신이나 요셉의 형들은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얼마나 통탄하며 후회하였을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동생인 요셉을 버렸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의 아버지 야곱과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된 자식이었습니다. 그들의 동생 요셉이 죽음으로 생명줄,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생명의 관계가 끊어졌고, 이제 막내 동생 베냐민마저도 죽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의 아버지 야곱도 죽게 될 것임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성도들 안에 그의 아들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생명줄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온전한 회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3. 완전한 회복은 완전한 중보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33절에,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유다는 총리 요셉에게 자신이 동생을 대신하여 담보, 즉 대신 감옥에 갇히고 노예가 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조롱하던 입에서 타인의 생명에 대하여 보증이 되겠다는 사랑의 선언이 나온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이 얼마나 놀랬을까요? 이러한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유다는 베냐민의 생사 문제를 담보하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짐승을 가지고 담보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담보한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요셉을 설득하고 있었기에 그의 간청에 엄청난 힘이 더해졌습니다. 유다가 자기의 생명을 대신해서라도 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이 말을 집중하여 보십시오. 과거 요셉의 형제들은 질투심과 시기심 때문에 그들의 무죄한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요셉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 요셉의 곁을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유다와 요셉의 형제들은 다른 형제를 위해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관계의 회복입니다. 이처럼 동생을 대신하여 담보가 되겠다고 하는 유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누구를 마음에 떠올릴 수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이 유다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담보로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삭 대진 바쳐진 숫양의 대속이나 요셉의 이야기에 나오는 유다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대속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그가 우리 대신에 속죄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고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실제로 그의 생명을 희생하지 않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완전한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의 완전한 회복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회복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바로 완전한 중보자 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로 계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완전한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인정하며 의지하는 사람만이 완전한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들, 문제의 상황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고, 이러한 관계의 회복을 통한 우리의 삶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기 위하여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믿고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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