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18 고전 11:17-34 분열을 넘어 연합의 식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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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넘어 연합의 식탁으로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우리는 매주 주일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왜 나는 매주 예배를 드리는데 내 삶은 변하지 않을까?”, “왜 우리 교회는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는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갈등과 소외감이 남아있을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17절에,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함께 모여 있는데, 그 모임이 영적으로 유익이 되기는커녕 “해롭다”는 것입니다. 모일수록 상처를 받고, 모일수록 영적으로 병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고린도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에는 철저한 계급과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일등실 승객들은 화려한 만찬과 에스코트를 받았지만, 배 하층부에 삼등실 승객들은 구명보트가 있는 갑판으로 올라가는 길조차 차단을 당했습니다. 결국 생존율은 일등실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삼등실 승객들은 차가운 바다에 대부분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돈과 권력과 배경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거나 차별합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성찬의 장소가 타이타닉처럼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하는 자리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성찬식(애찬)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함께 떡을 떼며 예수님을 기억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신분과 빈부격차를 그대로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각자 음식을 가져와 함께 식사를 나누는 ‘애찬’을 먼저 하고, 이어서 성찬식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낮에 일할 필요가 없는 부유한 자들은 일찍 와서 자신들이 가져온 고급 요리와 포도주를 배불리 먹고 취해버렸습니다. 반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야 했던 노예들이나 가난한 노동자들은 밤늦게서야 빈손으로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남은 음식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은 굶주린 채로 소외감과 수치심을 느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모습을 보고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단순히 음식을 먼저 먹은 죄가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죄이며,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 된 지체를 부끄럽게 만든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교회 안에서 은연중에 흐르는 끼리끼리의 문화, 학벌이나 재력, 직분에 따라 사람을 소외시키는 그런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범한 죄입니다. “저 집사님은 나랑 수준이 안 맞아”, "저 사람은 도움이 안 돼"라는 생각으로 지체를 소외시키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차별과 분열로 얼룩진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제정하신 성찬의 말씀을 다시 선포합니다. 24절에,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기념하라”는 말은 과거에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 놀라운 사랑의 사건을 지금 내 삶의 자리로 끌어당겨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묶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나의 옆에 앉아있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형제 안에도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살과 피를 모독하면서 형제를 차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바울은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대해 엄중히 경고합니다. 27절에,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지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합당하지 않게”는 개인의 도덕적 결백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에서 이 말은 “공동체의 연합을 깨뜨리고, 형제를 차별하고 멸시하면서 아무런 가책 없이 성찬의 떡을 홀로 배불리 먹는 이기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옆에 있는 형제자매가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지체를 아프게 하면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심판의 예배가 됩니다. 성찬을 받기 전, 우리는 “자기를 살피고”(28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지체들과의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나의 지체는 없는지, 내가 소외시킨 이웃은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성찬을 준비하는 참된 태도입니다. 바울은 33절에,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차별과 분열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은 “서로 기다리라”의 영성이었습니다. 교회에 일찍 온 부자들이 늦게 오는 가난한 노예 노동자들을 위해 기다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픔을 참고, 권리를 내려놓고, 약한 자의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추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찬의 정신이며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철새들이 V자 대형을 그리면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갈 때, 맨 앞에 서는 리더는 엄청난 공기 저항을 받으면서 날아갑니다. 지치면 뒤로 물러서고 다른 철새가 교대합니다. 만약 날아가다가 어떤 철새가 병들거나 지쳐서 대열에서 이탈해 땅으로 떨어지면, 다른 철새 두 마리가 함께 대열을 이탈해 그 철새가 회복되거나 죽을 때까지 곁을 지키며 기다려 줍니다. 그리고 다시 날아올라서 대열에 합류합니다. 철새들도 지체의 약함을 위해 기다릴 줄 압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하여 주저앉아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수준에 맞춰 주셨고, 우리가 일어설 때까지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런 기다림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를 기다려 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된 예배와 성찬은 우리의 이기심이 죽고 예수의 사랑이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의 자리로 나아갈 때, 다음 두 가지를 가슴에 새깁시다. 첫째로, 내 안에 있는 '고린도'를 무너뜨립시다. 세상의 기준(성공, 소유, 외모)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끼리끼리 모이던 옛 습관을 십자가 앞에 못 박읍시다.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 소외된 자, 새로 온 자,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밉시다. 둘째로, 서로 기다려 주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내 속도만 고집하며 다른 사람을 다그치지 맙시다. 조금 느린 지체, 연약한 지체가 있다면 기꺼이 나의 속도를 줄이고 그를 기다려 줍시다. 그것이 바로 성찬의 떡을 먹은 자가 세상 속에서 예수의 찢기신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 교회가 모일수록 영적인 유익이 넘쳐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따뜻한 연합과 위로가 가득한 예수님의 참된 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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