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04 새벽기도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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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벧엘로 올라가라 (창세기 35장 1-22절)
사람은 실패하면 도망갑니다. 넘어지면 숨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피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28장 21절에, 꿈에 천사들이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은 야곱은, 베게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고 제단을 쌓으면서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서원하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이렇게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게 하셨는데, 야곱은 그의 서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세겜에 머물면서 살기로 타협하였습니다. 그는 세상 가까이 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그의 가정은 무너졌습니다. 딸 디나는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욕보임을 당했고, 야곱의 아들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피의 복수를 했으며, 그의 집안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야곱이 다시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다시 찾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다시 올라오너라.” 벧엘은 회복의 자리입니다. 1절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전략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원점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처음 은혜받은 자리, 처음 울었던 자리, 처음 헌신했던 자리, 처음 하나님을 만난 자리, 다시 거기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그렇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첫사랑을 되찾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벧엘은 도망자의 돌베개가 예배의 제단이 된 곳이고 광야가 성전이 된 곳이며 두려움이 약속으로 바뀐 곳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셨구나!”라고 깨달은 곳이 벧엘입니다. 벧엘은 첫사랑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계시록 2장 4절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다시 벧엘로, 참 예배의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앞으로 가는 것보다 다시 돌아가는 게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기도하던 때, 처음 찬양을 부르며 울던 때, 처음 주님을 사랑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벧엘은 어디인가?” 우리를 벧엘로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다시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아들에게 달려가신 아버지와 같이 우리 아버지는 계산하지 않으시고, 뭐라고 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향하여 달려오셔서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벧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벧엘로 가려면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2절에,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여정 가운데는 과거를 정리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려는 벧엘로 길에는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이 그의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다음 세 가지의 행동을 통하여 과거를 정리하자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상을 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의 집에 우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믿는 사람의 집에도 우상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시에 우상을 섬기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도 있습니다. 돈,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자존심, 관계중독, 성공에 대한 지나친 집착, 심지어는 교회의 사역도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교회 일만 하거나, 교회 일에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것이 사역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둘째로, 정결하라고 말합니다. 회개 없는 회복은 없습니다. 눈물 없는 부흥도 없습니다. 죄를 그냥 내버려 둔 채로 벧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습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일을 멈추고 영을 따르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롬 8:6)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고,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갈 5:19-24) 셋째로,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말합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는 것은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의미입니다. 4절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라고 말씀합니다. 왜 신상들과 귀에 있는 귀거리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었습니까? 우상들과 그것을 향한 자신들의 탐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상과 탐욕의 옷을 벗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옷, 참된 예배자의 옷으로 바꾸어 입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벧엘 가는 자를 보호하십니다. 5절에,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이 모든 우상들과 우상의 의복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예배했던 장소인 벧엘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사실 세겜에서 벧엘로 가는 길의 사면에는 그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강한 가나안 족속들이 가득했습니다.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등 강한 족속들이 벧엘로 가는 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예배하기 위하여 벧엘로 가는 야곱의 길에 함께 하시며 다른 족속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시어 그들이 감히 야곱의 일행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야곱이 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사명자의 길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습니다. 순종하는 길에 하나님의 방패가 있습니다. 벧엘 가는 자를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벧엘은 예배가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6-7절에,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벧엘이라 부릅니다. “벧엘의 하나님”, 야곱은 이전에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중요해졌습니다. 성숙입니다. 은혜의 체험보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 복보다 그 복을 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에게 진짜 부흥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 회복과 부흥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내게 불을 주소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타는 것을 보게 하소서.” 예배에 불이 붙으면 도시 전체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상실 가운데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됩니다. 8절에, 리브가의 유모인 드보라가 죽었습니다. 왜 성경은 갑자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을까요? 드보라는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기 이전부터 리브가의 유모였고, 리브가가 결혼하여 에서와 야곱을 양육할 때에도 그들을 함께 키웠던 사람입니다.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을 때에도 그녀는 야곱의 진정한 조력자요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야곱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하여 애도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벧엘의 삶은 야곱에게 상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회복한 것, 예배를 회복한 것,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한 것입니다. 9절에,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축복하십니다. 또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10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또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것입니까?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지만, 그가 그 이름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브니엘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그 뜻을 “겨루어 이긴 자”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원어의 뜻은 “겨루는 자”입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이 이제는 하나님과 겨루는 자, 씨름하는 자,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로 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야곱은 여전히 그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답게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고 머리 쓰다가 가정이 망가지는 큰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를 야곱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 되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십니까? 11-12절에, 하나님은 야곱의 모습이 아직 이스라엘답지 않았지만, 이스라엘로 여기시며 그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새로운 이름대로 살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받은 존재임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시며, 그 이름에 걸맞게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언약을 다시 세워주십니다. “너는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니다. 다시는 너 자신을 실패로 부르지 말아라. 너는 하나님의 사람, 언약의 사람이다. 너는 복을 받은, 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사람이다. 나는 너를 이 이름으로 부르기를 원한다. 오늘 이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슬픈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습니다. 16절에, 야곱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베들레헴)에 이르는 길에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인 라헬을 잃게 됩니다. 요셉의 동생인 막내 베냐민을 낳는 중에 난산으로 아이를 낳고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에브랏, 즉 베들레헴에 장사지냈습니다. 야곱에게는 가장 슬프고 큰 상실의 경험이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야곱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그의 계획을 멈추지 않고 이루십니다. 에브랏, 즉 베들레헴은 우리에게 우리 구주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된 곳,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그곳, 야곱에게 슬픔의 장소이지만, 하나님께는 구원의 기쁨이 담긴 장소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장소도 하나님께는 우리를 다시 부르시고 회복하시어 구원하시는 은혜와 기쁨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만 할 수 없고, 슬픔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기쁨을 향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를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 믿음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벧엘로 올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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