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22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은사보다 더 큰 사랑으로 세우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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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보다 더 큰 사랑으로 세우는 교회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바벨탑 사건”에서,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늘에 닿고자 했을 때,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은 '언어의 혼잡'이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자, 인류는 흩어졌고 공동체는 깨졌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자 단절이었습니다. 반대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난 표적 역시 '언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각 나라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시작했고, 흩어졌던 이들이 언어의 소통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언어는 '하나 되게 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성령의 은사를 가장 많이 받은 풍성한 교회였지만, '방언'이라는 은사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서 “나는 영적으로 더 우월하다.”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못 하는 성도들은 소외감을 느끼며, “나는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라고 낙심했습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가, 인간의 교만과 결합하자 공동체를 깨뜨리는 무기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 후에, 14장에서 “은사의 목적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내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갈지를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1절에,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강력히 권면하고, 2절, 4절에,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에 알아듣는 자가 없고, 다만 “자기의 덕”을 세웁니다. 이는 영적인 충전과 개인의 기도 생활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반면에, 예언은 3-4절에,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바로잡아 주는 행위이며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바울이 방언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5절에, “나는 너희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예언(말씀의 대언과 위로)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탁월하다고 말합니다. “방언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자랑하며 자기 혼자만 영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교회 공동체의 화음을 깨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이기주의를 경계하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나의 은혜, 나의 만족, 나의 영적 체험”에만 갇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 눈물을 흘렸으니 됐다.”, “내가 찬양할 때 만족했으니 됐다.”라며 옆에서 방해받고 상처받는 지체들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또한, 위로와 권면의 언어(예언)를 많이 사용하십시오. 낙심한 지체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사님, 하나님이 집사님을 사랑하십니다. 힘을 내세요. 이것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라고 위로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가장 위대한 예언의 은사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두가지 비유를 들어 방언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먼저, 악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합니다. 피리나 거문고가 음의 분별을 하지 않고 무작위로 소리를 내면, 그것이 어떤 곡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8절에서, 군대의 나팔에 대한 비유를 말씀합니다. 군대에서 나팔은 신호입니다. 기상 나팔, 취침 나팔, 전진 나팔, 후퇴 나팔이 명확해야 군인들이 움직입니다. 만약 나팔수가 졸거나 흥분해서 정체불명의 소리를 불어대면 군대는 대혼란에 빠지고 전쟁에서 패할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바울은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영적인 소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랑하므로 듣는 사람에게 이해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허공에 하는 소리요, 외국인어가 될 뿐입니다.(11절) 이 구절을 근거로 방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Text)는 이렇게 말하게 된 상황(Context)를 고려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은 방언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언하는 것을 독려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방언하는 것을 자랑하거나 예배 중에 무분별하게 방언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취지로 말씀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상황에 맞지 않게 하면 소음이 되지만, 그러한 소리들이 함께 모여 조화(Harmony)를 이루면 그 감동이 배가되는 것처럼, 영적이면서 질서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방언은 어둠을 몰아내고 기도를 도와주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영적 부흥을 위해 방언하기를 사모하여야 하되 그것을 성령의 질서 안에서 하며, 무엇보다 예언, 즉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기를 더욱 사모하며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12절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말한 뒤,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를 설명합니다. 14-15절에,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지성)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영(Spirit)의 뜨거움과 함께 마음의 깨달음이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내 지성도 알아야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바울은 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뜨거운 영성과 함께 지성적인 깨달음과 삶의 열매를 함께 맺으십시오. 예배 시간에 감정적으로 뜨겁게 눈물 흘리고 방언으로 부르짖는 것은 너무나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기도가 끝난 후, 내 지성(마음)으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 만큼, 이제는 삶의 현장에 나가서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아야겠구나.”라는 이성적 결단과 말씀의 깨달음이 이어져야 합니다. 삶이 변하지 않는 영적 체험은 종교적인 중독일 뿐입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을 나누십시오. 교회 안에서 상처 주는 말, 내 자랑하는 말만 늘어놓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낙심한 영혼을 향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와 같은 진심을 전하며 격려하는 말들을 건네는 성숙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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